교실 중심 공간 개념의 한계
오랜 시간 동안 학교는 정해진 구조를 따르는 공간이었습니다.
복도를 따라 늘어선 교실들, 교사 책상이 앞에 있고 칠판과 스크린이 중심이 된 전형적인 좌석 배치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교사 중심의 수업을 자연스럽게 강화하고 학생들은 수동적인 위치에서 지시를 따르는 흐름 속에 놓이게 됩니다.
물론 이런 구조는 일정한 규율을 유지하고 효율적인 전달에 있어 장점도 있었지만, 학생의 자율성과 탐구 중심 학습을 지향하는 현재의 교육 방향에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많습니다.
특히 협력 학습이나 프로젝트 중심 수업이 강조되면서 물리적 공간이 오히려 학습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교실’이라는 한정된 틀을 넘어, 공간 자체가 배움과 소통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교육 요소로 다시 설계되어야 할 때입니다.
공간이 교육을 바꾼다
우리는 자주 잊곤 합니다.
아이들이 하루의 절반 이상을 머무는 공간이 바로 학교라는 사실을요.
이 공간이 아이에게 주는 정서적, 인지적 영향은 생각보다 큽니다.
교실의 조도가 너무 낮거나 책상이 일렬로 배열돼 소통이 어렵다면 학생들은 쉽게 집중력을 잃거나 수업에 소극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자연광이 잘 들어오는 창가에서 식물을 기르거나 동그랗게 둘러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면 그 자체로 학생들의 정서 안정과 관계 형성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는 기존 교실 일부를 ‘소리 없는 독서의 방’으로 바꾸어 조용히 혼자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이곳에서 책을 읽거나 창밖을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 결과 예민하던 몇몇 학생들의 행동이 부드러워지고 수업 집중도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고 합니다.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교육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곳이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마음도 닫히거나 열릴 수 있습니다.
유연한 공간은 유연한 수업을 만든다
전통적인 고정형 책상 배치는 수업 방식도 정형화합니다.
하지만 책상과 의자의 배치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도록 하면 수업은 유연해지고 학생들의 역할도 다양해집니다.
소그룹 활동에 적합한 원형 배치, 발표에 집중할 수 있는 극장형 구조, 조용한 몰입이 가능한 개별 학습 구역 등 수업 내용에 따라 공간을 변형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만으로도 교사의 수업 전략은 훨씬 다채로워집니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는 ‘모듈형 교실’을 도입하여 교실 안에 이동 가능한 칸막이와 가구를 설치했습니다.
한 시간은 전체 강의를 듣는 공간으로 다음 시간은 팀별 실험실처럼 교실을 변형해 활용하고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 모두 “교실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공간이 열려 있으면 수업도 열립니다.
공간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수업의 구조, 학생의 참여 태도, 교사의 언어 사용까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휴식과 쉼의 공간은 교육의 일부로
교육은 수업 시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이동 중에도 아이들은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낍니다.
하지만 많은 학교에서 복도와 계단은 단지 ‘이동을 위한 통로’로만 기능합니다.
그 공간이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곳, 친구와 소곤소곤 이야기할 수 있는 곳으로 바뀐다면 어떨까요?
광주의 한 고등학교는 계단참에 ‘마음 의자’를 설치했습니다.
학생들은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이곳에 앉아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의자에는 “이 자리에선 마음을 천천히 놓아도 돼요”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곳을 ‘숨 쉬는 계단’이라 부르며, 급한 하루 속에서 잠깐의 여유를 찾습니다.
이처럼 공간이 주는 메시지는 교육의 방향과도 연결됩니다.
쉬어도 괜찮고 조용히 있어도 된다는 허용은 아이들에게 ‘존재 자체로 괜찮다’는 교육적 수용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학교를 ‘함께 만드는 공간’으로
학교 공간을 재구성할 때 교사나 행정 중심의 결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학생이 직접 참여하여 자신의 공간을 기획하고 꾸며보는 경험 자체가 중요한 배움이 됩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방과 후 활동으로 ‘우리 교실 프로젝트’를 운영하며, 학생들이 조를 이루어 교실 한 구역을 직접 설계하고 바꾸는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벽에 코르크 보드를 붙여 친구들 간의 익명 편지를 나누게 하거나 작은 쿠션과 전등을 활용해 마음 정리 구석을 만드는 등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실현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공간을 설계하는 일이 단순한 배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여기에 머무는가’라는 본질적인 고민임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공간에 대한 주인의식은 학교 전체에 대한 책임감과 애정으로도 이어집니다.
학생이 머무는 곳, 머물고 싶은 공간을 만드는 일은 결국 그 자체가 교육입니다.
공간의 변화, 지속 가능한 흐름으로 이어지려면
학교 공간을 새롭게 구성하는 일은 단지 가구를 바꾸거나 벽을 칠하는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변화는 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질 때 비로소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즉, 물리적 공간과 더불어 그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함께 따라와야 합니다.
어느 해 리모델링 사업으로 예쁘게 꾸며진 공간도 1~2년이 지나 다시 창고처럼 방치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공간 자체보다 그 공간을 바라보는 태도와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간 재구성은 시설 공사 이전에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공간 철학 공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 공간을 왜, 어떻게 바꾸려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공감이 이루어져야만 그 공간은 살아남습니다.
또한 시설 개선과 함께 ‘공간 활용 교육’도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유연한 배치를 가능케 하는 교실 구조를 갖췄더라도 교사들이 새로운 수업 방식을 시도할 여유가 없다면 기존 방식으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따라서 교사에게는 수업을 설계할 시간과 자율성이, 학생에게는 공간을 책임감 있게 사용하는 연습과 기회가 동시에 주어져야 합니다.
지속 가능한 공간 변화는 그렇게 제도, 시간, 문화가 어우러질 때 가능해집니다.
부산의 한 중학교에서는 매년 초 ‘학교 공간 시민회의’를 열어, 학생·교사·학부모가 한자리에 모여 공간 사용 방침을 논의합니다.
이 회의를 통해 공동체는 작은 의사결정을 경험하고 변화된 공간에 책임을 나누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공간은 계속해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결국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공간은 교육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교육 자체로 작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 공간을 재구성하는 일은 교육의 외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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